충주홍주석씨의 유래





氏族의 연원

시조는 석린(石鄰). 고려 의종 24년(1170년) 무신정변/경인난(庚寅亂)에 공을 세운 후 이의방(李義方)에 서경낭장(西京郎將)으로 발탁되었고, 명종 6년(1176년)에는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서북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고 상장군(上將軍)으로 올랐다. 후에 예성부원군(蘂城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삼았다. 예성(蘂城)은 충주(忠州)의 옛 이름이다. '계축보(癸丑譜)'에 보면, 그는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기록되어있고 상계(上界)로는 중국 시조로부터는 25세이고 父가 되는 24세인 石寶用은 중국 송나라의 대사마 대장군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4세이면 700년 전인 後趙(석륵황제)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 석륵과 그의 후손들은 무예가 뛰어나 중원을 제패하였으나 왕조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석린(石린)은 힘과 무예(武藝)가 출중하여 무신들에게 발탁되어 공을 세우고 상장군이 되었으나 고려조정과 이의민의 알력다툼에서 희생되었지만 측근 두경승의 건재로 후손들은 살아남고 이어진 최씨 무인 정권에서도 여러 대에 걸쳐 문하시중 판결사 쌍성총관등 문무 고위직에 등용되었으므로 충주석씨(忠州石氏)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경인보(庚寅譜)' 서문에 보면, 석씨(石氏)는 8세 판윤공(判尹公) 석수명(石壽明)대에 와서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였고 문하주서공(門下注書公) 석여명(石汝明)은 충주(忠州)로 잉관(仍貫), 동원(同源)이면서 각기 다른 관향(貫鄕)을 갖게 되었다. 이는 6세 良善께서 조선 이태조의 아버지 이자춘과 호족 최씨 집안에서 동서가 되고 조실 부모한 이태조가 이모의 젖을 먹고 자라 조선 왕에 등극한 이듬 해 그 은공을 7세 天乙에게 내리고 8세 수명이 한성 판윤이 되고 이어서 이방원과 갈등으로 함흥으로 갈 때 따라 갔던 역사와 연결된다. 후에 '경인보(庚寅譜)' 수보(修譜) 때에 충주석씨와 홍주석씨는 대동보(大同譜)로 합보(合譜)하게 되었다.


본관 연혁(본관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

충주(忠州)는 충청북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BC 3∼4세기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그 뒤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었으나, 다시 고구려에 속해 475년(고구려 장수왕 63) 국원성(國原城)이라 하였다. 557년(신라 진흥왕 18) 국원소경(國原小京)이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중원소경(中原小京)이라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라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충주목(忠州牧)이라고 하였다. 995년(성종 14) 창화군(昌化軍) 으로 바꾸고 절도사(節度使)를 파견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가 1018년에 전국의 8개목 중 하나가 설치되어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254년(고종 41)에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는 충주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충주목이 되었다. 1395년(태조 4) 충청도관찰사를 두었으며, 명종•광해군•인조•숙종•영조 등 여러 시기에 모반 등으로 인해 유신현(維新縣) 또는 충원현(忠原縣)으로 개칭되면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 충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 실시로 충주부가 폐지되었고 충청북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8년(순종 2) 도청을 청주로 이전시키고 군수를 두었다. 1917년 충주군 읍내면이 충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 7월 충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중원군으로 분리되었다. 1989년 중원군 살미면 목벌리(木伐里)와 이류면 만정리(萬井里) 일부를 충주시에 편입하였고,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하여 충주시가 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충주석씨는 1985년에는 총 8,138가구 33,462명, 2000년에는 총 11,011가구 35,46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14,000여 가구 42,000명, 2017현재로는 45,000명 정도로 추정됨.


주요 세거지

'경인보(庚寅譜)'에 의하면, 6세 석양선(石良善) 이래로 함남 영흥군(永興郡) 일원에 충주석씨(忠州石氏)의 세천지(世阡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그곳에 자리잡고 세거해온 것 같다. 8세 석수명(石壽明)의 자손들 중에서 14세 석국세(石國世)의 대를 전후하여 일부가 전남 광산(光山)으로 옮겨간 것 같고, 석귀수(石龜壽)의 후계(後系)는 황해도 평산(平山)의 연미(燕尾) 등지에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8세 석여명(石汝明)의 자손들은 13세 석완(石岏)이 경기도 이천(利川)의 장호원읍(長湖院邑)에 정착한 이래 일부가 그곳에서 세거하였고, 20세 석남학(石南鶴) 이래로 충남 천원(天原)의 직산(稷山)에, 17세 석천원(石天原) 이래로 강원도 횡성(橫城)에, 그리고 18세 석지운(石之運) 이래로 경북 울진(蔚珍)의 온정(溫井) 등지에 산거(散居)했다고 믿어진다. 16세 석영옥(石永玉)의 후계(後系)는 충남 부여(扶餘)에서 살았고, 20세 석남점(石南點)의 후계(後系)는 전남 무안(務安)에서 살았다.

한편 11세 석관언(石寬彦)의 자손들은 15세 석감(石鑑) 이래로 충주(忠州)를 비롯한 충북 중원(中原)에 터를 잡은 것을 보이며, 20세 석시우(石時祐)가 충주(忠州)에서 대구(大邱)로 이거하였으므로 이후 자손들이 대구(大邱)와 달성(達成)등지에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또 18세 석창서(石昌瑞)의 후계(後系)가 충남 금산(錦山)에, 19세 석동규(石東圭)의 후계(後系)는 경북 의성(義城)에 각각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11세 석성옥(石成玉)이 연산 12년에 벼슬을 버리고 경남 밀양(密陽)의 상서(上西)로 은거하였으므로 자손들이 그곳에 살게 되었으며 16~17세의 대에 걸쳐 일부가 함안(咸安)의 칠원(漆原), 청도(淸道),인동(仁洞/현재 구미시),합천(陜川)의 초계(草溪), 성주(星州), 경산(慶山)의 자인(慈仁) 등지로 옮겨가 정착하였다.

또한 11세 석광정(石光鼎)의 후손들은 경북 달성(達成)•대구(大邱) 등지에 세거하였다. 10세 석인정(石仁正)의 자손들은 평남 성천(成川)•평원(平原)의 순안(順安)에서 살다가 16세의 대부터 정주(定州)•안주(安州)•대동군(大同郡) 등지로 산거(散居)해갔고 일부는 평양(平壤)에 자리잡았다. 10세 석의정(石義正)의 후계(後系)는 11세 석사진(石斯珍)•석사진(石斯珍)의 후계(後系)가 경남 의령(宜寧)•합천(陜川)•창녕(昌寧) 등자와 경북 안동(安東)•성주(星州)•예천(醴泉)•광주(廣州)•석사성(石斯珹)•성주(尙州)•영주(榮州)•광주(廣州) 등지에 나뉘어 살았고, 석의정(石義正)이 관북(關北) 시찰 때 데리고 갔던 석옥점(石玉玷)•석옥진(石玉瑧) 두 아들의 후계(後系)는 함북 부령(富寧)•경성(鏡城)•명천(明川)•성진(城津) 등지에 살았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평남 성천(成川),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장호원읍(長湖院邑), 광주군(廣州郡) 중부면(中部面), 충북 제원군(堤原郡) 한수면(寒水面), 경남 창녕군(昌寧郡) 대합(大合)•이방면(梨房面), 함안군(咸安郡) 일원, 경북 달성군(達成郡) 옥포면(玉浦面), 경산군(慶山郡) 남천면(南川面)•자인면(慈仁面) 영풍군(榮豊郡) 평은면(平恩面), 성주군(星州郡) 선남면(船南面)•용암면(龍岩面)•금수면(金水面), 평북 정주군(定州郡) 남서면(南西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