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派) 소개





석씨(石氏)가 충주(忠州)와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게 된 것은 7세 석천을(石天乙)의 아들에 이르러서이다. 조선 개국 후 이성계(李成桂)는 그를 길러준 이모부 석양선(石良善)과 이모를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과 경창옹주(慶昌翁主)로 봉하였다. 그후 석천을(石天乙)―석수명(石壽明)의 자손대 이후로 홍주(洪州)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이 개국하자 석여명(石汝明)은 벼슬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태종이 석여명(石汝明)을 충주(忠州)의 수의산회문동(守義山回文洞)에 안치시켰는데, 이후로 석씨(石氏)가 홍주(洪州)와 충주(忠州)로 분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조동원(同祖同源)이므로 경인보(庚寅譜) 수보(修譜) 때에 두 석씨(石氏)가 '대동보(大同譜)'로 합해지게 되었다.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는 8세조인 석수명(石壽明)과 석여명(石汝明)을 파조(派祖)로 하여 분파한다. 석수명(石壽明)의 후손은 판윤공파(判尹公派)이다. 석여명(石汝明)에게는 문수(文守), 문현(文賢), 문성(文成)의 세 아들이 있는데, 문수(文守)의 후손이 참판공파(參判公派), 문현(文賢)의 후손이 참의공파(參議公派)로 나누어지고, 문성(文成)의 후손은 세분된다.

석문성(石文成)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 석인정(石仁正)의 후손이 모정공파(茅亭公派), 석의정(石義正)의 후손이 병사(兵使)공파, 통덕랑파(通德郞派), 방어사(防禦使)공파, 선전관(宣傳官)공파, 첨정(僉正)공파의 5개파로 분파되었다. 석예정(石禮正)의 후손이 현감공파(縣監公派)이며, 석지정(石智正)의 후손은 승지(承旨)공파, 석신정(石信正)의 후손은 한림(翰林)공파로 분파되었다.